산 알고가자

합천 남산 제일봉

도 우 2011. 10. 1. 16:09







우리나라 삼보(三寶)사찰 중 하나인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 예부터 조선팔경의 하나로 손꼽혀온 경승지다. 거칠게 솟은 기암들로 가득한 산세는 마치 불꽃이 피어난듯한 모습이다. 그런 기암과 어우러진 가야산에 단풍이 들어 산자락 전체를 빨갛게 달아오르게 한다.

가야산 등산로는 크게 2가지다. 백운동지구서 시작해 만물상 서성재를 거쳐 주봉인 상왕봉(1,430m)에 올랐다가 해인사로 내려오는 5~6시간 소요되는 코스와 해인사지구의 해인사관광호텔 옆 돼지골로 올라 남산제일봉(1,010m)을 찍고 청량사로 내려오는 3~4시간 코스다. 최근엔 백운동지구서 시작하는 만물상 상왕봉 코스로만 사람들이 몰린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한산한 남산제일봉을 선택했다. 단풍도 좋지만 인파에 시달려가며 고생할 필요는 없을 터. 호젓한 분위기에서 가야산의 단풍을 만끽하기로 했다.

시작부터 널찍한 돌길이다. 둥글둥글해진 바닥의 돌들. 길의 역사가 짧지 않음을 알려준다. 마차도 한 대 지날 만큼 길은 넓었고 평평했다. 길섶 시누댓잎이 서걱서걱 마르고 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서도 가을이 깊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파르르 떠는 이파리에선 냉기가 번져온다. 바람이 차다. 평평한 산길 지나는 이도 없다. 혼자 가을을 곱씹는다. 돼지골의 가을은 호젓했다.

드디어 능선에 올라섰다. 계단길을 오르니 하늘이 열렸다. 나무 사이로 건너편 가야산 주봉 능선이 펼쳐졌다. 곱디 고운 남산제일봉의 속살을 벗어나자 저멀리 가야산이 실체를 드러냈다. 삐죽삐죽 솟은 바위산이다. 탑 같은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은 산자락에 단풍이 내려앉고 있다. 이제 막 빨갛게 불이 붙기 시작했다. 대가람 해인사와 해인사에 딸린 여러 암자들이 옹기종기 그 단풍 속에 들어앉았다. 그 위로 두리봉 상왕봉 칠불봉 등의 산너울이 펼쳐졌다.

남산제일봉의 기암 능선은 갈짓자로 휘돌아 내려간다. 기암의 촉수들은 꼿꼿하게 하늘을 찔렀다. 기암의 능선 너머론 노랗게 익은 논들이 층층의 계단을 이뤘다. 물을 가득 담은 저수지에도 정한 가을이 빠져들었다.

남산제일봉의 꼭대기. 까마귀 서너 마리가 창공을 가른다. 이 봉우리의 주인은 너희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듯, 붉은 단풍 위로 검은 날갯짓을 해댄다. 자신의 영공임을 시위한다.

가야산이 해인사를 품었다면 남산제일봉은 그 가야산을 한 눈에 품을 수 있는 산이다. 해인사에서 봤을 때 남쪽에 제일 높은 봉우리란 뜻의 남산제일봉은 이외에도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천개의 불상이 서있는 것 같다고 해서 천불산이라고 불리고, 기암들이 꽃처럼 아름다워서인지 매화산이라고도 불린다.

남산제일봉에는 불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조선시대에 해인사는 7차례의 큰 화재를 겪었다. 풍수하는 이들은 불꽃처럼 솟은 남산제일봉의 산세가 불을 닮았고 그 불기운이 날아들어 불이 났다고 했다. 절에선 화기를 누르기 위해 남산제일봉 정상에 매년 단오날 소금단지를 묻기 시작했다. 소금은 바다이고 물기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단오날을 택한 이유는 1년 중 양기가 가장 센 날이기 때문이다.

이젠 그 남산제일봉 기암의 능선 속으로 들어간다. 철계단을 내려가는 데 그 경사가 아찔하다. 바람도 거셌다. 철봉을 쥔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성철 스님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이 바로 이 남산제일봉을 바라보며 정진했으리라. 오르락 내리락 그 기암의 능선에 몸을 맡긴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깎아지른 벼랑엔 수직의 계단을 이용해 타고 내려갔다 또 올라야 한다. 주변의 풍경도 가만 놔두질 않는다. 경사는 아찔, 풍경은 아득했다. 한참을 등에 땀을 빼며 오르락내리락하고서야 능선에서 내려올 수 있었고 숲에 들어섰다. 이젠 몸으로 맞던 바람도 나무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로만 느낀다. 칼능선의 칼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숲길을 한참을 내려가니 산길은 작은 사찰과 닿았다. 최치원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청량사다. 9세기에 지어진 곳이다. 가야산은 신라 때 학자인 최치원과 인연이 깊다. 그는 세파에 지친 육신을 누일 은둔지로 가야산을 선택했다. 가야산에 헤진 갓과 신발만 남겨두고 산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신선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청량사는 최치원이 즐겨 찾던 사찰이다. 이곳의 석등과 석탑, 석불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청담 이중환은 인문지리서인 '택리지'에서 '경상도의 산들은 대개 돌화성(石火星:불꽃 모양의 바위)이 없는데, 오직 합천에 있는 이 산만 뾰족한 바윗돌이 불꽃같이 이어졌다. 바위가 하늘에 따로 솟은 것처럼 아주 높고 빼어나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금강산과 지리산은 침입했지만, 이 산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하여 이 산은 예로부터 삼재가 들지 않는 곳이다'라고 썼다. 청담이 지리산 이남의 최고의 산이라고 추켜세운 산이 가야산이다.

웅장한 산세와 깊은 골, 계절 따라 바뀌는 산색도 아름답지만 가야산 하면 떠오르는 건 석화성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석화성의 참맛을 느끼려면 가야산에 오르기보다 수도산·단지봉 등 수도지맥 준령이나 가야산 주변 산에 올라야 한다. 산행팀이 찾은 남산제일봉(1,010m)도 이런 조망미를 물씬 안겨주는 가야산 자락의 고봉 중 하나이다.



남산제일봉의 '남산'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가야산 남쪽에 있는 산이란 뜻이다. 하여 남산제일봉은 '가야산 남쪽의 으뜸인 봉우리'라는 뜻이다. 한때 남산제일봉과 이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1.1㎞가량 떨어진 매화산(954.1m)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산으로 취급했다. 두 산은 엄연히 다른 산이다. 일부 관광지도에도 '남산제일봉(매화산)'으로 병기했다. 그러다 지난 1972년 10월 13일 가야산이 제9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산 명칭을 바로잡았다.

남산제일봉 산행은 통상 청량사에서 올라 정상을 밟고 해인사버스터미널로 내려온다. 이 행로는 기이한 멧부리를 보며 오른다는 매력이 있지만, 고도 300m대인 청량마을부터 청량사~정상을 줄곧 된비알과 씨름해야 한다는 고충이 있다. 산행팀은 이번에는 코스를 거꾸로 돌려 해인사터미널에서 출발해 청량사로 내려오도록 꾸며봤다. 산행 초입부터 만나는 숲길이 정상까지 연결되고 가풀막도 거의 없어 순한 등로가 되겠다. 산행 말미에는 고운 최치원이 놀았다는 홍류동 계곡도 나온다. 산행 거리 약 8㎞, 소요시간 3시간 40분(쉬는 시간 포함) 정도.

가야산 지정 탐방로는 현재 백운동~가야산 상왕봉(정상)~해인사 구간과 남산제일봉 코스만 개방됐다. 이정표가 잘 설치됐고, 정해진 등로를 따라야 하기에 길을 헤맬 염려는 없겠다.



산행 기점인 해인사터미널에서 해인사우체국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아미교가 있다. 다리를 건너 해인사관광호텔까지 3분가량 걷는다. 호텔 앞 주차장에 가야산 국립공원 대형 안내도화장실이 있다. 화장실 옆에 있는 길이 본격적인 산행 들머리이다. 깃대종 설명 푯말도 있다. 깃대종은 특정 지역의 생태적 특징을 반영하는 동식물인데, 가야산은 멸종위기동물 2급인 삵과 '가야산은분취'가 깃대종이다.

산행 초입부터 넉넉한 숲이 나온다. 소나무, 개벚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등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수종도 있지만 물푸레나무, 노각나무, 고로쇠나무, 팥배나무, 정금나무, 대팻집나무 등 쉽게 만나기 어려운 나무도 여럿 있다. 나무마다 이름표를 달고 있어 간단한 특징을 기록해뒀다.

첫 번째 이정표에서 오른쪽은 치밭골, 왼쪽이 돼지골이다. 치밭골 등산로는 막혔다. 호젓한 길을 걷는데 하늘에서 '타닥타닥' 하고 뭔가가 떨어진다. 발밑을 살폈더니 도토리다. 주변을 돌아보니 길바닥에 도토리가 널브러져 있다.

너덜을 지나 이동통신 중계기가 있는 곳부터 길이 펑퍼짐하다. 남산제일봉은 골산이지만 여기까지는 육산인가 싶을 정도로 길이 순하다.

10분 정도 여유 있게 올랐다. 오봉산(968m)과 남산제일봉 사이의 안부에 다다랐다. 오봉산 쪽 등산로도 막혔다. 오른쪽으로 나무 데크가 설치돼 있다. 데크를 오르면서 뒤를 돌아봤다. 나무 사이로 가야산이 힐끔힐끔 보여 애간장을 태운다.



안부에서 남산제일봉 아래의 전망 좋은 곳까지 15분쯤 오른다. 고도가 눈에 띄게 상승하지만 그다지 숨은 차지 않다. 잠시 뒤 눈앞에서 남산제일봉의 꼭대기가 훤히 드러난다. 마치 화강암으로 레고 블록을 쌓은 것처럼 돌들이 계통 없이 덩이를 이룬 모양새다.

이곳에서 5분가량 더 오르면 남산제일봉 철 계단이 나온다. 합장하는 모양의 기암 옆으로 설치된 계단을 이용해 정상에 올랐다. 애간장을 태우던 가야산이 저기 멀리 있다. 아쉽게도 상왕봉, 칠불봉은 보이지 않고 중봉과 상아덤, 만물상은 뚜렷이 보인다.

서쪽으로 몸을 트니 수도지맥의 산들이 코앞에 있는 것 같다. 그 뒤로 백두대간의 산 주름이 산 물결을 이루며 다가온다. 일망무제라. 날씨가 좋아 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 덕유산 능선이 푸른빛을 띠며 떡 하니 앉았다. 동쪽으론 금오산, 팔공산, 비슬산의 마루금이 사이좋게 박혀 있다.

남산제일봉 한가운데 바닥에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다. 해인사의 화재를 막으려고 스님들이 묻은 소금단지이다. 전설에 따르면 남산제일봉의 기운과 해인사 대적광전의 기운이 충돌해 해인사에 불이 자주 났다. 풍수가의 도움을 받아 단오 때 정상에 소금단지를 다섯 방향에 묻었고, 그 후론 해인사의 화재가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한다.



철계단을 밟고 하산길을 연다. 희한한 모양의 기암들이 능선에 쭉 늘어서 있다. 원숭이바위, 촛대바위, 주먹바위 등 산행팀은 생긴 대로 이름을 붙여 보았다.

20분 정도 신기한 바위를 실컷 보고 나면 데크 전망대가 나온다. 데크 전망대에서 청량사까지는 경사가 제법 심한 내리막이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확인하니 고도가 뚝뚝 떨어진다. 20분 정도면 청량사에 도착한다.

청량사는 해인사 산내 암자로, 창건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이 이 절에 자주 놀러 왔다고 기록돼 있다. 가람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65호)과 석탑(보물 제266호), 석등(보물 제253호) 등 보물이 있다. 대웅전 옆에 한자 '용(龍)'을 새긴 돌 약수대가 있는데, 글자 사이로 물이 흐른다.

청량사에서 매표소를 지나 탐방지원센터까지는 15분 정도. 황산저수지와 매화산장 식당을 지나 청량동마을 입구까지 무던히 걷는다. 청량동에서 무릉동까지는 포장도로가 깔렸는데, 차량은 거의 없는 편이다. 무릉동부터는 고운 최치원과 성철 스님이 자주 와서 놀았다는 홍류동 계곡을 따라간다. 멀리 앞쪽으로 가야산 만물상이 홍류동을 내려다보고 있다. 청량동 마을 입구에서 종점인 버스정류소까지 2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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