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사찰 순례

월출산 무위사

도 우 2013. 3. 24. 18:45

무위사   [無爲寺]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월출산 동남쪽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617년(진평왕 3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한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꾼 뒤에 많은 승려가 주석했다고 하며

946년(정종 1)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했고,

1555년(명종 10)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현재의 이름인 무위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 경내에 있던 목조건물은 극락전(국보 제13호)·명부전과 요사채뿐이었으나

 

1974년에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門)·분향각(焚香閣)·천불전·미륵전 등을 새로 지었다.

 

 

이밖에 경내에는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와

종형의 옥신을 가진 사리탑, 석탑형식을 한 부도가 있고

미륵전 안에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그리고 1955년 보수공사 때 무위사가 1476년에 크게 중창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및 29점의

불화는 조선 초기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재 삼존불상과 후불벽화만 남기고 모두 벽화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다.


 

 

 

무위사 해탈문

 

 

해탈문을 통하여 보이는 극락보전

 

 

해탈문 주위의 동백나무

 

 

 

해탈문 주위에 떨어진 동백이 지천이다

 

 

 

 

무위사는 불사가 한창이다

 

 

 

 

 

 

무위사는 전각이 많치않고  단촐하여 해탈문을 들어서면 곧장 극락보전이 보인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13호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 국보 제13호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312호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며, 연꽃대좌와 하나의 나무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들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앞쪽에 흘러내린 옷주름은 아래 대좌에 표현되어 있어 불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목조불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으로

조선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너무도 궁금하여 그만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문화재청 홈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康津 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국보  제313호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아미타삼존불벽화이다.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 2불씩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었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채색은 주로 녹색과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조선 성종 7년(1476)에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홈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無爲寺極樂殿白衣觀音圖)  보물  제1314호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문화재청 홈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하얀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홈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 성종 7년(1476)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홈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문화재청 홈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무위사극락전내벽사면벽화(無爲寺極樂殿內壁四面壁畵)  

보물  제1315호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벽화로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를 포함하여 총 29점이다.

지금은 모두 해체되어 보존각에 보관ㆍ진열되어 있다.

이 벽화는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 1점, 입불도 1점 등으로

극락보전 안쪽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대세지보살 (문화재청 홈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삼존불화는 동쪽벽 중앙에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과 6비구를 배치하였다.

배경으로는 바위산을 그려 넣었다. 본존불의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입고 있는 옷주름은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아미타래영도는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아미타불을 그렸는데 8대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모습이다.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자연스러우며, 인물의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얼굴 표정, 움직이는 듯한 자세 등 회화성이 돋보인다.

이들 벽화 중 삼존불화와 아미타래영도 2점과 15세기 추정의 관음보살도, 당초문도 2점 등 4점은 특히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3층석탑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보물  제507호

 

 선각대사편광영탑과 나란히 서있는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무위사의 동백림

 

 

 

 

무위사는 사세는 단촐하지만 수많은 국보와 보물들이 있는 멋진 가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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